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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난이 없었다면 병자의 결과는 후금의 침략이 있었더라도 막아냈거나 그 정도의 굴욕까지는 안당했을 가능성이 클까요?
후금의 침략이 있었더라도 막아냈거나 그 정도의 굴욕까지는 안당했을 가능성이 클까요? 북방 정예군 증발 + 이괄의 잔병들이 후금에 조선 상황과 수도까지 바로 진격 가능한 경로 알려줌 + 반란으로 인해 장수들의 군권 회수와 지휘체계 약화당시 명나라는 어느 정도 건재한 상황이었고 청(후금)은 그 때문에 조선 침략시 손실을 최소화하고 속전속결로 끝냈어야 했죠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은 알지만, 이괄의 난이 조선 역사에 너무 큰 영향이 아닐까 궁금해서 질문 올려봅니다.
이난은 한국사에 특이한 경우인데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합니다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1623년 4월 11일(음력 3월 12일)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지만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고
이불만을 낌세를채고 동료였든 1624년 음력 1월 문회, 허통, 이우 등이 이괄과 이괄의 아들 이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현집, 이시언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게되자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 하게되자
이괄은 기익헌, 한명련 등과 함께 압송하러 온 사람들을 죽이고 1624년 3월 11일(음력 1월 22일) 항왜병 100명을 선봉장으로 하여 1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인조는 김유의 말을 들어 기자헌, 김원량 등 40명의 연루자들을 처형시켰다.
이괄의난은 그리 깊은 연관성을 없었움
병자호란의 원인
병자호란은 당시 조선 정부의 외교적 실책과, 약체인 군사력, 무엇보다 명(明)이 기울고 청(淸)이 일어서던 대외(對外)정세에 대한 정보 수집력이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는, 명청 교체기, 즉 명(明)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족(후금)이 강해지기 시작했었죠. 하지만, 조선은 일찍부터 명나라에 조공하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명나라는 이전에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해서 조선을 구원해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이었던 광해군은 국제정세를 읽고,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의 중립외교를 펼칩니다.
인조반정이후. 새로 들어선 인조정부는 광해군과는 정반대되는 정책, 즉 명나라를 가까이하고 청나라(당시 후금)를 배척하게 됩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홍타이치)은 조선을 침략합니다.이것이 병자 호란입니다